목회자의 유무급은 부르심에 응답의 문제다....(목사 김병년,, 다드림 교회)

by 씨앗스토리 posted Jan 13,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목회자의 유‧무급은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의 문제다(1)

교회를 개척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들이 물었다. “아빠, 월급 얼마야?”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응, 약 240만원.” “그래? 아빠 엄청 많이 받네.” 백만 원 단위가 넘어가는 사례비를 들으며 아들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아들, 엄마 간병비가 한 달에 얼만지 알려줄까?” “응.” 아들도 아빠처럼 평안한 얼굴을 하고 대답을 기다렸다. “병원비만 한 달에 250만원.” 대답을 듣고서 한참을 생각에 잠기던 아들이 묻는다. “근데 아빠, 우리를 위해서 남겨둔 돈은 있어요?” “그럼, 있지. 아빠가 하늘에 많이 쌓아두었지.” “보험은 들었어요?” “왜? 두려우니?” “아니 그냥, 우리가 갑자기 아프면 안 되잖아요.”
아이들은 병든 엄마를 돌보는 아빠를 수 년 동안 지켜보았다. 병원비, 간병비, 약값, 그리고 월세, 교육비…. 이 수많은 지출을 감당해온 아빠의 ...‘수완’(?)을 대견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 마음속에 돈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져 있음도 발견한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경제적 필요가 내가 받는 사례비보다 항상 더 컸다. 우리 가정의 필요를 다 채울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재정으로 살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섬기는 교회도 별다르지 않았다. 내가 교회를 개척할 때 구성원 대다수는 신혼 가정이었다. 빚내서 결혼하는 젊은 성도들에게 말했다. “교회 재정을 책임지려고 과하게 헌금하지 말아라. 지금은 너희 가정을 잘 세워라. 나중에 40, 50대가 되면 교회 재정을 책임질 날들이 온다. 가정부터 세워라.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하다.”
대출이자와 상환 부담을 안고 사는 성도들에게 교회의 부채는 (목회자도 마찬가지지만) 이중적인 부담과 고충을 안길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교회 재정운용 원칙을 대출 없는 현금 중심으로 잡았다. 현금 중심의 재정운용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추구할 선교와 구제 사역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구제의 대상을 외부로만 한정하지 않고 교회 안의 가난한 성도들도 포함함으로써 교회가 서로를 책임지는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도록 했다.
성도들이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의 정당성과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어려울 때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이 불신을 낳고 교역자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한다. 성도들이 경제적인 불안정과 재정적인 결핍을 겪을 때 공동체의 정점에 서 있는 목회자는 정작 별다른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면 경제적인 위기를 맞은 성도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다. 자신의 경제적인 고통을 함께 할 교회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년 예산도 믿음으로 10% 인상합니다.” 우리는 이런 식의 예산 편성에 아주 익숙하다. 한 해 결산보다 훨씬 많은 재정을 편성하고 ‘주실 줄 믿습니다’를 연발한다. 그러다가 편성된 예산에 미치지 못하는 결산을 하면 믿음 없다고 책망을 받는다. 예산을 늘리는 ‘더하기’를 믿음이라 한다면, 예산을 축소하는 ‘빼기’는 사랑이다.
2015년 결산 당시, 당회가 2016년 세계 경제와 우리나라 경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반영하여 2016년 예산을 결산보다 300만원 감액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교회도 동참하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2017년에도 경기회복의 어려움이 예견됨에도 당회는 2016년 결산을 근거로 오히려 약 3천만원을 증액하였다. 이는 그동안 필수품마저 구입하지 않고 억제해오던 것들을 반영한 결과였기에, 그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알리고 제직들과 성도들의 동의를 구하였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회건축을 위해서 긴축재정을 편성하고 운용한다. 교회건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성도들의 삶을 세우기 위해서 교회재정을 운용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 아닐까. 재정 운용을 잘못해서 당회가 성도들로부터 신뢰를 잃기도 하지만 성도들을 돌보지 아니함으로써 근본적인 불신을 낳는다. 영적인 신뢰는 “양의 냄새가 몸에 밴 목자”가 됨으로써 생겨나며,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를 책임지는 공동체를 이루어가게 된다.
성도들은 영적 신뢰가 떨어진 목회자에 대해 재정지출 문제를 계기로 갈등을 일으킨다. 물론 아무리 신뢰하는 목회자라 하더라도 정당한 견제 수단을 확립하는 것은 교회를 보호하는 유익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재정의 전횡은 반드시 부패를 낳기 때문이다. ‘목회자를 포함한 당회가 성도들의 삶을 고려하는구나’라고 확신하는 언약적인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은 목회자의 유급 또는 무급에 대해 성경적인지 비성경적인지를 논하는 것을 지엽적인 문제로 여긴다.
“목사는 직업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례를 받지 않고 설교했다”는 다소 도발적인 글을 쓴 필자나, 자극적인 기사제목을 뽑음으로써 필자의 원래 의도를 오해하게끔 쓴 기자나, 이 글에 대하여 “나는 유급목사다”라며 다소 자기 방어적인 주장을 펴는 글들이나 모두 왠지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언약이 없는 공동체는 삶의 실재 앞에서 공허하다. 개인의 책임성만 강조하거나 이기심만 극대화하는 구조를 낳기 때문이다.

 

이미지: 사람 1명 이상, 인파